사진(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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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제주의 거문 오름에 첫 발릉 딛는 순간 삼나무 숲에 갇히고 말았다. 정말 어두웠다. 나무와 잎 사이를 비집고 햇살이 숲 속으로 스며들었다. 내 영혼이 찬 물로 샤워를 한 느낌.
2022.11.04 -
제목 없음
동네를 산책하다 내 눈에 들어온 풍경 녹색 합판으로 되어 있는 담장 안에서는 모종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을 터. 공사장 내부와 외부는 작은 창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마 법으로 창을 내게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대개 그 창문은 투명한 아크릴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담장 안의 나무가 몸을 비집고 그 창문을 통해 비집고 나왔다. 같은 나무이지만 밑동은 담장 안에, 위쪽은 담장 밖으로 나뉘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옆의 나무는 은근슬쩍 담장을 넘어와 늘어져 있다. 담장 안의 노란 나뭇잎, 담장 밖의 빨간 나뭇잎 녹색 합판으로 된 담장. 묘한 구성으로 이 가을의 한 풍경을 만들었다. 그런데 뭐라고 제목을 붙여야 좋을까?
2022.10.29 -
순간
순간(瞬間)이라는 시간 단위는 눈 깜짝이는 시간을 말한다. 물론 한 눈을 감고 사진을 찍을 때는 원래 순간이 뜻하는 시간보다 조금 더 걸린다. 거리의 기둥에 자건거 한 대가 기대어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그 옆을 지나고 있다. 한 순간이 지나고 나서 카메라의 셔터가 열렸다 닫히니 이런 사진이 나왔다. 마치 자전거를 타는 사람 옆에 누군가가 같이 자전거를 타고 인도 위를 달리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순간이 만들어내는 허상, 혹은 조작된 모습..
2022.10.28 -
비상
그랜드 캐년에 해가 지고 달이 떴다. 한 여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을 남자가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남자 뒤에서 이 모든 걸 내가 찍고 있다. 마침 구름 끝에 달이 걸려 있다. 마치 비행기구름을 뒤에 남기고 날아가는 제트 비행기처럼 달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우연인지 그 순간 여인이 뛰어올랐다. 여인과 달의 비상.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그런데 그 여자와 남자가 서 있는 바위는 아래가 까마득히 보이는 절벽 위다. 순간을 잡으려는 열망이 두려움을 망각하게 만든다.
2022.10.28 -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안간힘을 쓰고 대지를 뚫고 세상으로 나온 새싹들, 나뭇가지 어디에선가 돋아난 잎새들, 봄의 기운으로 자라다 모진 여름 햇살도 받고 억센 비바람도 견디어 냈겠지. 어디 몸에 상처 한 두 군데 없을까. 그래도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긴 시간을 지내며 빠알갛게 물든 그대의 얼굴이 상처 때문에 그대 얼굴이 더 빛이 나는 계절. 가을이 깊다.
2022.10.28 -
오로라의 기억
오로라 찬란한 하늘 아래 흰 눈 덮인 산들 솟아 있고 이 민족의 숭고한 정신인양 사시 장철 장엄한 모습 조상들의 뼈가 묻힌 내 고장 핀란디아 오 나의 조국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렸던 '핀란디아'의 가사다. 국민악파인 시벨리우스가 작곡한 교향시 핀란디아의 주제에 가사를 얹은 노래를 배우며 오로라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되었고 가끔씩 내 입에서 오로라가 튀어나왔을 것이다. 어느 날 둘째 처제가 들뜬 목소리로 "노르웨이행 비행기 표가 아주 싼 가격에 나왔다"라며 흥분한 목소리로 내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싼 비행기 표 덕에 우리는 핀란드 대신 노르웨이로 오로라를 보러 떠났다. 1 월 중순, 그 추울 때, 그것도 북극에 가까운 노르웨이의 트롬쇠라는 곳으로 오로라 알현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알현이라는 말을 굳이..
2022.10.22